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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127 | 127 | 결국 그는 2000년 8월 12일, 대통령궁 공식 연설에서 더 이상 관련 질문에 대한 반론을 중단하고 다음과 같은 짧은 입장을 발표했다: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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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128 | 128 | > “국민 앞에 진실을 숨기고 싶진 않았습니다. 저의 경솔함과 판단 착오로, 루이나라는 국가의 품격에 흠을 남긴 것에 대해 사과드립니다.”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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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129 | 129 | === 탄핵과 퇴임 ===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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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130 | | 하원은 탄핵소추안을 가결했으나, 상원에서는 부결되었고, 대통령은 법적으로는 직을 유지하였다. 하지만 퇴임을 불과 5개월 앞둔 시점에서 지지율은 65%에서 37%로 곤두박질쳤고, 그는 재출마 포기와 함께 정계 은퇴를 선언하며, 2001년 1월 공식 퇴임했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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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130 | 2000년 9월, 테오 셔먼 특별검사의 보고서가 의회에 제출되며 대통령 존 F. 페어팩스를 둘러싼 성추문은 정점에 도달했다. 루이나 하원은 즉각 탄핵소추안을 상정했고, 권력형 성비위, 공직 공간의 사적 유용, 증거 은폐 시도 등 4개 조항에 따라 9월 14일 찬성 219표, 반대 204표로 소추안이 가결되었다. 이는 루이나 헌정사상 세 번째 대통령 탄핵소추 사례였으며, 최초의 성비위 중심 탄핵이기도 했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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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132 | 그러나 상원은 대통령직 박탈이라는 최종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. 한 달 뒤인 10월 17일, 상원 표결 결과는 찬성 56표, 반대 44표로, 가결 정족수(3분의 2)에 단 6표가 모자랐다. 이에 따라 페어팩스 대통령은 법적으로는 직위를 유지할 수 있었지만, 정치적으론 사실상 완전히 무너진 상태였다. 여론조사에서 그의 지지율은 사건 이전 65%에서, 상원 표결 직후 37%까지 급락했고, 특히 여성 유권자층과 청년층에서의 신뢰는 회복 불가능한 수준으로 추락했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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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134 | 사실 그는 이 시점에서 2기 집권 4년차, 즉 헌법상 가능한 최대 임기인 8년을 거의 모두 채운 상태였다. 루이나 헌법은 대통령의 연임을 1회, 최대 8년으로 제한하고 있기 때문에 법적으로는 더 이상 재출마가 불가능한 ‘끝물’ 상황이었으며, 애초에 정계 은퇴는 예정된 수순이었다. 그러나 이 스캔들은 그의 퇴장을 단순한 임기 만료가 아닌 국민적 실망과 불명예의 상징으로 만들어버렸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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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136 | 2000년 11월 4일, 페어팩스 대통령은 벨포르 시청 앞 시민 간담회에서 재출마 불가 방침과 함께 정계 은퇴를 공식 선언하며 대중 앞에 고개를 숙였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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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138 | > “제가 다시 여러분의 신뢰를 얻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릴 것입니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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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139 | >그러나 그 신뢰가 언젠가 회복된다면, 그것은 제 이름이 아니라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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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140 | >제가 섬겼던 이 나라의 품격 때문일 것입니다.”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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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142 | 2001년 1월 20일, 그는 헌법이 정한 임기를 모두 마친 뒤 루이나 대통령궁에서 열린 간소한 이임식에서 후임 대통령에게 정권을 이양하며 퇴임했다. 그리하여 존 F. 페어팩스는 루이나 역사상 최초로 탄핵소추를 받고도 임기를 완주한 대통령, 그리고 동시에 루이나 역사상 가장 치욕적인 퇴장을 맞은 대통령이라는 두 얼굴의 이름으로 남게 되었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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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131 | 143 | == 이후 ==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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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132 | 144 | == 여담 ==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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